- 영조 보리밥 물에 말아먹는 서민적 밥상 즐겨
수랏상은 12첩 반상으로 놓는 위치도 정해져 있다. 반드시 국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받고, 동편에는 왕, 서편에 왕비가 좌정한다. 겸상은 없고 시중드는 수라상궁도 각각 3명씩 대령하고, 수라상도 원반, 곁반, 책상반 등 3개가 들어왔다.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임금이 먹을 수 있는 국의 종류만 64가지 정도였다.
수랏상에 산해진미가 오를지라도 국왕들은 어려서부터 과식을 멀리하는 절제의 미덕을 몸에 익혀야 한다.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왔기에 평민과 달리 체질이 가아하지 못해서 먹는 데 집착했다가 자칫 병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보리밥을 물에 말아먹는 서민적 밥상을 즐겼다고 한다.
현대의학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흰쌀 밀가루 육식을 줄이고 채소 보리 콩 등 잡곡과 채소를 즐겨 먹어야 한다. 배를 80%만 채우는 기분으로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영조는 절제된 삶을 살았던 장수한 국왕으로도 유명하다. 또 영조는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부터는 50여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아 어려운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같은 해 2월에는 세손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는 등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해 주는 국왕이었다.
그는 특히 근검절약과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 중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를 금지하는 조치를 하기도 했다. 영조가 무엇보다 훌륭한 국왕으로 평가받는 것은 이처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통치뿐만 아니라 그 자신부터 철저하게 절제된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왕들은 12첩 밥상을 주로 받는 것이 관례였지만 영조는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반찬을 줄이고 식탁을 검소하게 했다. 칠순이 넘어서 잔치를 벌일 때는 술 대신 생강차 등을 쓰도록 했고 쇠고기는 빼도록 했다.
1694년에 출생한 영조는 1776년까지 살았다. 82년을 향유한 것이다. 1724년 즉위하여 왕위에 있던 세월은 52년이나 된다.
국왕의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은 대부분 각 지방에서 진상한 식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국왕들은 식재료의 상태를 보고 지방 백성들의 상황을 미뤄 짐작해야 했다. 조선시대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은 어느 것 하나 사사로운 것이 없었다. 모든 행위가 정치요 통치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먹는 즐거움조차 온전히 개인적인 것일 수 없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같은 재난이 들면 왕은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아예 밥상을 물리는 감선(減膳), 또는 고기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철선(撤膳)을 시행했다. 신하들과 당파싸움을 다스리기 위해 이른바 단식투쟁인 각선(却膳)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팔도에서 올리는 진상 및 공납으로 식재료를 조달하긴 했지만 외국에서 구입해 들여온 진기한 식재료나 민간에서는 먹지 못할 정도로 귀한 음식은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봉송(封送)’ 문화가 있었다. 이건 국왕이 음식을 다 들고 ‘퇴선(退膳)’ 하고 나면 여러 신하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다. 서울의 반가음식이 궁중음식과 닮은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하지만 궁중음식은 일반 음식과 차별을 뒀다. 양반이라도 차릴 수 있는 상을 9첩 이하로 제한하고 12첩 반상은 궁중에서만 가능했다. 요즘 2만원짜리 한정식 한상차림보다 덜 풍성했다.
양반의 밥상, 결코 풍성하지도 호화롭지도 않았다
반가음식과 관련 착각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양반 상을 번지르르한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사또 밥상’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인드가 출중한 청렴한 선비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음식의 맛을 논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음식을 탐하는 이와는 허교도 하지 않았다. 상당수 양반들은 3첩 반상, 국과 밥, 김치와 된장, 나물 한 점 정도만 있어도 맛있게 먹었다. 잔칫날이나 명절 등에만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사만은 풍성하게 치장했다. 자기는 굶어도 조상 제사 음식은 정성을 다해 챙겼던 것이다.
양반가 식문화의 가장 독특한 게 바로 밥상물림이다. 그걸 존수하다보면 몸이 많이 축나게 된다. 이걸 양상수척이라 해서 덕의 상징으로 여겼다. 안동 등 경북 북부지방 양반가에선 어른이 밥을 남기는 걸 ‘체면한다’고 했다. 그걸 모르면 ‘본배(本向) 없는 자’로 낙인이 찍힌다. 자연 종부는 주발에 넉넉하게 남을 정도의 고봉밥을 퍼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문중도 있다. 도산면 퇴계 종가에서는 먹을 만큼만 밥을 담는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워낙 접빈객이 많아서 가계도 축나고 해서 밥을 적게 담은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선비문화
감사 뜻으로 헛기침 세 번
대부분 끼니 때 국·밥·김치·된장
쌀밥, 고기는 잔치·제사때만 먹어
음식보다 식사예법 목숨처럼 여겨
아랫사람 먹게 하려고…
밥 다 먹는 법 없어
어른 수저 들기 전에는
아랫사람 식사 못해
어른이 다 들 때까지
밥상서 기다려야
‘상전무언(床前無言)’. 양반은 밥을 먹을 때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또한 식사할 때 처음부터 밥을 떠먹어도 흉이 됐다. 독상을 받으면 우선 ‘삼고례(三告禮)’를 올린다. 보통 헛기침을 세 번 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의 기운을 합일시키는 절차다. 때론 젓가락을 모아 식탁에 세 번 내려치기도 한다. 이 소리를 들으면 부엌에선 숭늉 준비를 한다. 맨 먼저 무슨 음식부터 먹어야 될까. 반드시 종지에 담긴 지렁(조선간장)부터 조금 떠먹은 뒤 본식을 개시했다. 좋은 지렁은 좋은 소금에서 온다. 좋은 천일염은 진상되는데 3년 이상 간수를 그늘에서 빼내야 한다. 그게 들어가면 음식에 쓴맛이 돈다.
지렁을 먹고 난 다음에는 동치미 국물을 떠마신다. 동치미는 좋은 물과 좋은 소금, 좋은 동치미 무만으로 요리되는 조선 음식 중에서 가장 심플하면서도 웅숭깊은 맛을 드러낸다. 평양에선 이 동치미 국물에 냉면을 말아 먹는다. 강원도 양양 동해안 등지에서도 요즘 동치미국수를 즐긴다.
국에 밥을 말아먹지도 않는다. 이런 연유로 국 따로 밥 따로, ‘대구 따로국밥’이 탄생할 수 있었다.
밥을 떠먹을 때도 법도가 있었다. 떠먹는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23.5도 기운 지구 자전축을 따라 밥을 퍼먹었다. 7시 방향에서 1시 방향으로 이동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45도의 삽시각을 유지하면서 퍼내려가되 반드시 오른쪽 모서리에 밥을 조금 남겨야 했다. 이게 초승달처럼 생겨 일명 ‘초승밥’이라고 했다. 조선에선 초승밥처럼 정이 담긴 밥이 두 개 더 있다. ‘까치밥’과 ‘사자밥’이다. 까치밥은 짐승을 위해 가을걷이를 할 때 모두 다 걷지 않고 조금 남겨두는 농작물이다. 사자밥은 저승사자를 위해 세 그릇의 밥을 미투리와 함께 대문 앞에 내놓았다.
‘규합총서’에 사대부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식사예법이 적시돼 있다. 일단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면 그때서야 수하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어른이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하면 아랫사람은 수저를 놓고 기다려야 했다.
양반들은 절대 점심 때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일찍 와도 때가 되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예의였다. 붙잡는다고 해서 바로 식사에 응해서도 안 된다. 양반은 절대 겸상하지 않고 독상을 받는다. 반가음식의 본령은 평상시 먹는 일상식이 아니라 제사음식이었다.
특히 안동 등 경상도 북부권 유림에선 더욱 그랬다. 제사 중에서도 차사(茶祀)보다 기제사(忌祭祀)가 중시됐고, 기제사보다 불천위 제사를 더 중시했다. 불천위란 나라나 지역 향교에서 망자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봉행하는 것으로 나라에서 정한 걸 ‘국불천위(國不遷位)’라고 한다.
노진 기자 k-today@hanmail.net